교육자료

[스크랩] 종려주일]어린나귀를 타신 예수님

내향적인 2015. 3. 20. 16:27

☞예수가좋다오

어린나귀를 타신 예수님

마태복음 21:1-11 / 강동렬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된 날입니다. 종려주일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가장 길고 중요한 시간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말씀, 기적,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십자가가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때문에 말씀과 기적과 삶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기록이 마태복음에는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마가복음은 5분의 3을 차지하고, 누가복음에는 전체의 4분의 1이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몇 가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왕 중 왕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나무나 초라했습니다. 구약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을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보잘 것 없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옛날 승전장군은 큰 말을 타고 마차와 군사와 함께 입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과 함께 입성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은 마치 바보들의 행진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넷째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보고 ‘호산나’로 찬양했습니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원은 커녕 군중들이 ‘죽이라’고 돌변하는 바람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의 입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 종려주일을 맞아 나귀를 타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듣기 원합니다.

 

A.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2절에는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1:2와 누가복음 19:30에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합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었지만 예수님이 타신 것은 나귀 새끼, 즉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것은 나귀 새끼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가급적이면 큰 나귀를 타시지 왜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요? 그 이유를 구약 성경에서 인용합니다. 그럼 본문 5절이 인용한 구약의 성경구절을 보겠습니다. (스가랴 9:9)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을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과 권세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과 온유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청각 자료로 보여주셨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의 탄생기념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의 높이가 1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허리를 아주 숙이지 않고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말구유를 볼 자격이 없음을 소리 없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겸손해야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주님과 발걸음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순간입니다. 군중들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곧 왕의 왕으로 맞아들이는 예식을 펼쳤습니다.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끌고 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자 대다수의 무리들이 역시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을 모신 새끼 나귀의 가는 길에 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흔들었습니다(7-8). 이런 왕의 즉위식을 우리는 북 이스라엘의 예후 왕의 즉위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왕하9:13)“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들이 손과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한 종려주일, 그 날은 왕위 즉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주인공이신 우리 주님은 왕이면서도, 왕의 즉위식조차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본질이 온유와 겸손이셨습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을 초청하시면서 자신을 이렇게 피력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마11:29)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빌2:6-8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인간, 불순종의 죄에 빠져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실 때, 본래 사람이 아니셨지만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이신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자신을 비워 사람같이,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주님, 그 주님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겸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이 신앙의 진정한 멋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심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겸손하지 않는 것, 십자가가 없는 것이 어떻게 기독교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고 열두 번을 더 바뀌어도 우리들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섬긴다면 반드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할 때 내 가정이 변하고 한국 사회를 복음으로 물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한국 기독교는 위기입니다. 교회의 불행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날마다 매스컴에 오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부끄러운 신세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귀타신 예수님을 찾지 않고 백마 탄 왕자와 같은 영광의 예수님만 찾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 없는 번영의 종교에 심취한 결과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에서 신선한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썩은 악취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전에 연탄아궁이를 사용할 때를 기억하십니까? 당시에는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산소탱크기 구비된 병원에 빨리 가야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가정에는 산소탱크가 비치된 병원 연락처가 있었습니다. 만일 산소탱크가 없는 병원에 달려가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산소탱크가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탱크는 있는데 산소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겸손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만일 운전면허 학원에서 운전 기술 대신 노래나 가르쳐주고, 대입 영어학원에서 웅변이나 가르친다면 누가 그런 학원을 다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등을 지는 것입니다. 목사가 무슨 정치적 권세가 필요합니까? 서로 단체장이 되겠다고 이전투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세상 법원에 제소해서 교회가 법의 심판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번에 감리교 감독 다툼 때문에 변호사 비용으로 지출한 돈만 한 쪽에 15억씩 합 30억이나 들었답니다. 산소탱크가 없어졌습니다.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질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고 어떻게 전도가 되길 바라겠습니까?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산소탱크를 확인해 봐야 하겠습니다. 탱크는 멀쩡한데 산소가 바닥나지 않았는지 살펴보십시오. 겸손과 희생의 십자가를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내게 충만하지 않으면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예수님을 등에 업은 나귀처럼 겸손하십시오. 주님께서 나의 등을 타고 가실 수만 있다면 내 자존심이 망가지고 내가 가난해져도 행복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영어 이름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크리스토’라는 말과 ‘등에 업다’는 뜻의 ‘오페이로’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는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주님을 등에 업은 성도가 되지 않으시렵니까? 지금 교회에서 농어촌교회 목회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을 마련하고 선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딸기잼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직들이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할지라도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해 아이스크림 하나 사 들고 찾아와 보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이고 겸손입니다. 주님을 등에 업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B. 나귀 새끼는 주님이 쓰실 주님의 도구입니다.

 

3절에는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왜 그 나귀입니까? 왜 어린 나귀입니까? 단지 성경은 겸손하여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합니다. 겸손하여 그 나귀를 타셨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택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나귀는 알지 못하는 선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는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한 장면에 꼭 필요한 선택된 도구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찬송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을 하나의 도구입니다. 내가 미천하지만 그러나 내가 없으면 하지 못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들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쓰임 받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감격입니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려는 도구로 선택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세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들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내어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사사들은 힘과 지혜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게 하여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달하여 백성들을 깨우치고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여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위하여 세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실 도구들입니다.

 

쉘돈 바나우켄은 “기독교를 위한 최상의 도구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과 확신과 온전함을 보라.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도구 역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이 우울해하고 전혀 즐거워하지 않을 때와 또 편협하고 공격적일 때 기독교는 수천 번도 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살리는 도구이며 동시에 죽이는 도구입니다. 내가 주님께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께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을 보세요.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 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손과 발을 드리니, 나의 음성 드리니, 나의 보화 드리니,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를 찬송합니다. 그리고 4절에는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하늘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라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4절을 부를 때 입을 다물고 찬송 안 하시는 분이 있다면서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이 쓰실 도구입니다. 나의 지식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재물이나, 몸이나, 생명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괴테는 “우리는 모루(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 보다는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착각은 예수님처럼 자신이 채찍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채찍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진 채찍이 되어야 합니다. 채찍으로 치면 제일 아픈 게 채찍입니다. 내가 먼저 아파야 교회가 변합니다. 내가 먼저 도구가 되어야 교회가 깨끗하게 됩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는 우리의 손 이외에는 그의 일을 할 손이 없네. 우리의 발 외에는 사람들을 그에게 인도할 발이 없네. 우리의 혀 외에는 그가 어떻게 죽으셨는가 말해 줄 혀가 없네. 우리 외에는 그의 곁으로 사람들을 데려다 줄 사람이 없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도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이 드린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의 이 처절한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쓰실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낌없이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은 하나님이 온전히 쓰신 결과입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의 의미이며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아낌없이 쓰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4에는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온전히 쓰임을 받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온전히 쓰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온전히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주가 쓰시겠다”하면 온전히 나의 생명, 나의 손과 발, 나의 시간, 나의 보화까지 다 드리는 주님의 어린 나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메모 :